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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2020.01.26 / NATHAN MULLET

 

 

개요

 1982년에 김기순이 창시한 대한민국의 협업마을형 신흥종교로 신도들의 여러 피해 진술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법원은 김기순에게 조세포탈, 횡령 등의 혐의를 확정했다. 현재는 와해된 상태이다.

 

 

위치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대장로278번길 203-107

 

 

역사

김기순 종교 배경

 아가동산의 교주인 김기순은 평범한 주부였다가 1978년 전라북도 이리시에 있던 사이비종교인 '주현교회'를 다니게 된다. 

 1969년 08월 26일 설립한 주현교회의 경우 이교부라는 이름의 교주가 이끄는 교회로 신도들에게 머리를 밀게 하거나 폭행하기도 했고 예배 중에 신도들과 옷을 벗고 나체로 춤을 추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다 교회 모금을 하기 위해 테이프 등을 판매한 다른 교회의 목사를 폭행했고 이로 인해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1981년 04월 08일 출소했다. 이 시점에서 주현교회는 해산했다.

 

아가동산의 시작

 이교부의 수제자였던 김기순은 자신이 이교부의 영혼을 계승하면서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갈 곳 없는 신도들을 불러 모았고 1982년 경기도 이천시의 4천여 평의 땅을 구입해 아가농장을 세웠다. 아가농장이 세워진 후 신도들은 떡 장사, 어묵 장사, 음반 장사를 통해 모은 돈을 김기순에게 상납했고 이 돈으로 부를 축적한 김기순은 1982년 12월에 레코드 유통 전문 업체인 '신나라레코드물류'를 설립해 음반점에 카세트 등을 납품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1982년 아가농장을 '신나라'로 선포했고 1989년에는 '아가동산'을 창시했다. 모든 비용은 신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얻어졌고 아가동산을 창시한 시점에는 처음 4천여 평의 땅이 13만여 평으로 늘어나 있었다.

 신나라레코드물류의 경우 초기에는 트럭으로 다른 음반점에 카세트 등을 납품하다가 1984년 서울 종로 3가에 첫 매장을 열어 가격파괴 전략으로 음반도매업계를 장악했으며 1992년에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신사옥을 세우고 법인명을 '신나라유통'으로 변경했다. 이후 킹레코드, 하나레코드, 명반레코드 등 여러 매장을 오픈해 1996년 강원, 충청, 전라, 경상지역 음반유통량의 50%, 서울 30%의 점유율을 자랑하는 국내 최대의 음반유통사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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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동산의 끝

 하지만 1995년 08월 아가동산 이탈 주민들이 교단 측의 탈세와 사기 등 온갖 비리에 대해 경찰에 신고했고, 검경 합동수사에 돌입해 1996년 12월 07일에는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에서 일부 주민 살해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김기순의 영장이 발부됐다. 하지만 김기순을 체포하기 위해 아가동산을 들이닥친 순간 김기순은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다.

 1996년 12월 10일 관리책임자 등 핵심 신도 3명을 구속해 공개수사로 전환되었고, 영장 발부 시점에서 행방을 감췄던 김기순은 1996년 12월 16일 검찰에 출두해 관련 혐의에 대해 부인하면서 결국 구속됐다.

김기순 진술내용 전문 [관련 기사]

자수하게 된 동기 :
언론을 보고 너무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억울한 이유 :
검찰수사가 일방적 진술에만 근거해 이뤄졌고 언론 보도도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신도 살해 및 암매장 사건에 대한 생각 :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어떤 살해지시도 내린 적이 없고 폭행가담 사실도 없다.
또 그 같은 광경을 본 적도 없다.
다만 나중에 '죽었다',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등의 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알려지고 있는 아가동산에 대한 견해 :
우리는 종교단체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지도 않고 찬송가도 부르지 않는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종교단체라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아가동산 이탈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살해된 사람들의 유해발골 작업에 실패했고, 1996년 12월 27일 김기순 외 10명이 살인 및 사기 혐의로 기소, 1997년 04월 28일 검찰은 김기순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나머지 간부들에게는 중형을 구형했으나, 사체 암매장 협의자였던 굴삭기 기사의 진술 번복과 5살의 피해자였던 최 군의 친모가 '아이는 살해당하지 않고 선천성 심장병으로 죽었다'며 진술을 번복하면서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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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 인해 1997년 05월 20일 김기순은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에서 조세 포탈, 횡령 등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년과 벌금 56억 원을 선고받았고, 살해혐의는 모두 무죄, 신나라유통 대표이사였던 강 씨에겐 징역 2년 6개월 및 벌금 60억 원을 각각 선고했다.
 김기순은 보증금 1억 원을 내는 조건으로 석방되었고 이후에 1998년 03월 03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과 1998년 06월 2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관련 기사] [관련 기사] [판결문]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검찰은 신도들의 진술에 따라 김기순의 살인 혐의를 다시 한번 입증하기 위해 2001년 07월 04일 다시 한번 발굴작업을 했지만 유골을 찾지 못했고, 2002년 04월 02일에도 김기순에게 위증교사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또다시 유골을 발굴하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결국 2002년 04월 29일 김기순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수사가 종결되었다.

 

 

이교부의 복수

 한편 아가동산은 김기순이 구속된 시점부터 신도들이 나가기 시작해 김기순이 완전히 출소한 시점인 2000년 08월에는 와해되었다.

 와해되자마자 이교부는 '주현교부'라는 이름의 사이비종교를 또 설립해 아가동산 신도들을 재흡수했다. 이교부는 아가동산 와해 이전부터 이탈자들을 데리고 검찰에 출두해 증언을 하는 등 아가동산을 와해시키고 빼앗긴 신도들을 자기편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주현교부는 익산시에서 운영되고 있긴 하나, 친목모임으로 바뀌는 등 큰 사회적 물의 없이 운영되고 있다.

 

 

아가동산의 기행과 악행

신 김기순

 아가동산은 개신교에서 예수만 빼고 그 자리에 김기순이 있는 전형적인 사이비종교로 핵심 교리는 김기순은 신이자 3살짜리 아이이기 때문에 '아가야'라고 불러야 하며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교리는 아가동산 내부에서 '아가야 법'으로 불렸다.

 또한 김기순은 신도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기성 종교에 대한 비난을 하며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찬송가에 예수를 아가 또는 아가야로 변경해 자신을 칭송하게 만들었다. 각종 행사에서는 꽃가마를 타고 나타나거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등의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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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착취

 아가농장은 농장관리, 장부관리, 의료관리, 학생관리, 세무관리 등 관리직을 두고 철저하게 공동체 생활 및 공동작업으로 운영되었다. 신도들은 매일 06시부터 24시까지 낮에는 농장, 밤에는 공장에서 CD 및 테이프를 만들며 끊임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모든 수익은 김기순 개인에게 축적되었고 사용처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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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들은 1년에 신정, 광복절, 크리스마스, 교주생일만 쉴 수 있었다. 교주 생일에는 김기순을 우상으로 하는 연극을 상연했기 때문에 쉴 수 있었고 이외의 영상매체나 신문, 외부 출입, 가족 면회 등 바깥 소식을 접하는 건 금지되었다.

 

가족 분리

 김기순은 자신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다 흩어놓았고 아버지를 아저씨, 어머니는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남처럼 대하게 했다. 형제간의 호칭도 금지되었고 부부간 동침 금지, 신도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모두 중졸 학력으로 만들어 병역까지 고의로 면탈시켰다.

 

폭행과 살인 의혹

 1987년 08월 14일 21시 7세 아동을 교주 김기순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돼지우리에서 일주일 동안 굶기고 폭행해 죽게 했다.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몇 대씩 때리고 나오는 방식을 사용해 실제로 아동에게 자신들이 가하는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1988년 01월 02일에는 과수원 책임관리자 또한 교주의 말을 잘 안 듣는다며 살해당했다.

 1988년 11월엔 김기순 자신의 아들을 현혹시켜 교리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으로 창고로 끌려가 부모에게 1차 폭행지시 후 여러 신도들의 각목에 맞아 살해당했다. 교단 측에서는 가출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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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해당 폭행과 살인 의혹은 아가동산의 이탈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내용이며, 여러 차례 유골 발굴에 실패와 신도들의 진술 번복에 의해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무죄로 판결되었다.

 

 

김기순 근황

 징역 4년과 벌금 56억 원을 선고받았던 김기순은 출소 후 벌금도 모두 납부하고 유유자적하게 잘 살고 있다고 알려졌다. 아가동산이 와해되었지만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계속해서 부를 축적해 왔으며 아가동산 또한 '신나라네이처팜'이라는 일반 개인농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 중에 있다.

(신나라레코드는 신촌점, 홍대점, 용산전자랜드점, 압구정점, 고속터미널점, 강남점, 대전점, 일산점을 모두 폐업하고 현재 홍대점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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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성명 : 김기순
  • 출생일 : 1940년 11월 01일
  • 출생지 :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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