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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ro, Egypt (Published on October 28, 2019 / Omar Elsharawy)

 

 

개요

 시리아 전쟁은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제26대 왕이자 헬레니즘 문명(Hellenistic period)을 만들어낸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후계 다툼을 벌인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을 거쳐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Empire),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의 3 왕국 체제가 성립된 이후에 발생한 전쟁으로 콜엘레-시리아(Coele-Syria)와 레바논(Lebanon),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지배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집트(Egypt)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은 기원전 274년부터 168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Seleucid Empire alternative map

 

 

제1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74년 - 271년)

 

Hellenistic world blank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Antiochus I Soter)는 세력 확장을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II Philadelphus)가 지배하고 있던 시리아(Syria) 해안과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리던 아나톨리아(Anatolia) 남부를 점령했지만 기원전 271년까지 이어진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공격으로 해당 지역을 되찾았고 거기에 더해 카리아(Caria)와 시리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시리아에 가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이복형제였던 마가스(Magas)가 키레나이카(Cyrenaica) 지방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는 더 이상 세력 확장을 하지 않고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휴전을 맺었다.

 

 

제2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60년 - 2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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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6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가 사망했는데 장남은 기원전 267년 역모 혐의로 처형되어 차남이었던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Antiochus II Theos)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한 안티오코스 2세는 시리아 문제를 둘러싸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켰고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ntigonid dynasty)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중해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안티오코스 2세를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안티고노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연합군은 기원전 261년 발생한 코스 전투(Battle of Cos)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력을 상실시켰고 안티오코스 2세는 팜필리아(Pamphylia)와 이오니아 지방(Ionia)을 점령, 밀레토스(Miletus)와 에페소스(Ephesus)를 점령했다.

 이를 지켜보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코린토스(Corinth)와 칼키스(Chalcis)를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셀레우코스 왕조를 향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의 지원은 중단되었다. 지원이 끊긴 안티오코스는 더 이상 세력 확장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253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는 강화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또한 강화를 체결함과 동시에 그 징표로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인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Berenice Phernophorus)와 결혼했다.

 

 

제3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46년 - 2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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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오코스 2세는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와의 결혼 이후 아들을 낳았지만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사망하자 안티오코스는 이혼했던 전처 라오디케 1세(Laodice I)와 재결합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이었던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와 라오디케의 갈등을 유발했다. 갈등이 심화된 상태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사망한 해 안티오코스 2세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라오디케 1세는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후 베레니케는 그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2세 카리니코스(Seleucus II Callinicus)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죽음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Ptolemy III Euergetes)가 왕으로 즉위한 상태였고 그의 누이였던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가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분노했고 제3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을 고용해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셀레우코스 세력을 공격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크(Antioch)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기세를 몰아 바빌론(Babylon)까지 진격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246년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안티고노스 2세가 이끄는 해군과 벌인 안드로스 전투(Battle of Andros)에서 패배해 키클라데스 제도(Cyclades)를 빼앗기면서 잠시 주춤거리게 된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에겐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고 셀레우코스 2세의 모친이었던 라오디케 1세가 셀레우코스 2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Antiochus Hierax)를 앞세워 아나톨리아 지방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기원전 241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강화 조약을 맺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크(Antioch)를 비롯한 시리아 북부 지역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2세는 곧바로 모친인 라오디케 1세와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를 상대로 내전을 시작했다.

 

 

제4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19년 - 2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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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35년에 벌어진 앙카라 전투(Battle of Ankara)를 통해 셀레우코스 2세에게 승리한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아나톨리아 영토를 점령했지만 기원전 229년에 벌어진 하르파소스 전투(Battle of the Harpasus)에서 페르가몬(Pergamon)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1세(Attalus I)에게 패전해 도주한 트라키아(Thrace)에서 살해됐다. 셀로우코스 2세 또한 기원전 225년에 사망했고 그의 장남이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Seleucus III Ceraunus)가 왕으로 즉위했다. 왕으로 즉위한 셀레우코스 3세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를 정벌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진군했지만 기원전 223년에 암살되면서 그의 동생이었던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Antiochus III the Megas)가 왕으로 즉위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후 동쪽 메디아(Media)와 페르시아(Persia)의 반란을 진압했고 기원전 222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죽음 이후 왕으로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Ptolemy IV Philopator)에게 기원전 219년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는 본래의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불신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간신들에 의해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왕권은 미약했고 이 상황을 틈타 피에리아 지방(Pieria)과 페니키아(Phoenicia)의 도시들 중 티레(Tyre)를 탈환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곧바로 이집트를 침공하는 대신 페니키아에 1년 넘게 머물면서 수복한 영토들을 공고히 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외교적 제안을 기다렸다. 그동안 이집트에서는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해 기원전 217년 벌어진 라피아 전투(Battle of Raphia)에서 승리했고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로의 진출이 가로막힘과 동시에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제5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02년 - 1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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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급사하면서 불과 네 살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Ptolemy V Epiphanes)가 왕으로 즉위했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지속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화되어 무정부 상태까지 이어졌다. 이 틈을 타 안티오코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프 5세(Philip V)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 이외의 영토를 정복하고 공유하기로 합의한 후 콜엘레-시리아(Coele-Syria)를 침공했다. 기원전 200년 파니움 전투(Battle of Panium)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에게 승리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던 로마(Rome)가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 직후 그리스에 개입해 이집트 자체를 침공을 삼가라고 요구했다. 두 군주 역시 이집트를 침략할 생각은 없었기에 로마의 요구에 응했고 안티오코스 3세는 군사를 돌려 이집트가 점령한 카리아와 킬리키아 해안을 습격했다. 결국 기원전 195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내정에 집중하기 위해 안티오코스 3세와 강화를 맺었고 그로 인해 셀레우코스 왕국은 코엘리-시리아를 소유하게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 쉬라(Cleopatra I Syra)와 결혼하게 되었다.

 

 

제6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170년 - 1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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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90년 로마와의 마그네시아 전투(Battle of Magnesia)에서 패배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아타톨리아 영토를 상실했고 안티오코스 3세가 안정시켰던 동방 영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Ptolemy VI Philometor)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이었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펠루시움(Pelusium)과 같은 중요한 전략적 도시를 신속하게 점령하면서 우위를 가져가기 시작했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로 하여금 이집트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는 이집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Ptolemy VIII Euergetes)를 유일한 통치자로 선포했다.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9년 겨울이 되자 군사를 물렸다. 셀레우코스군이 물러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8세가 서로 화해했고, 안티오코스 4세가 계획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속국화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셀레우코스군은 다시 한번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자 이집트는 동맹국인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로마 원로원에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Gaius Popillius Laenas)를 파견했다. 그동안 안티오코스 4세는 키프로스(Cyprus)와 멤피스(Memphis)를 함락시키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는 상태였다. 수도 외곽인 엘레우시스(Eleusis)에서 안티오코스 4세를 만난 로마 원로원에서 파견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지팡이로 모래 위에 원을 그리며 그 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결정하라는 로마의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로마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결국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토해내고 물러났다. 이후 엘레우시스의 날로 불리는 이 날로 인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이집트 영토 정복의 희망은 무산되었다.

 

 

시리아 전쟁 이후

 제6차까지 이어진 시리아 전쟁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원전 167년부터 141년까지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마카베오 전쟁(Maccabean Revolt)을 통해 안티오코스 4세를 잃었고 그로 인해 기다긴 내전에 휘말리면서 주변국들의 완충지대가 되어 명맥을 이어가다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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