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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Metropolitan City of Rome, Italy (Published on April 5, 2021 / Tamara Malaniy)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또는 한니발 전쟁(Bellum Hannibalcum)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인 기원전 218년부터 202년까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를 주축으로 하는 카르타고(Carthage)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Mediterranean at 218 BC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형세)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Blank Map - Mediterranean

 

 카르타고는 로마 공화국과의 패전 이후 시칠리아(Sicily)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줘야 했다. 이로 인해 제 때 급료가 지불되지 않자, 용병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와의 조약을 통해 접근이 안 되는 사르데냐(Sardinia)와 코르시카(Corsica)에서 이를 진압하다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이후 3년 4개월 만에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는 로마와의 분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기원전 237년 갈리아(Gallia)에서 로마가 전쟁을 하는 동안 히스파니아(Hispania)로 이주,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기원전 228년에는 히스파니아 동쪽 현 스페인 카르타헤나(Cartagena)라고 불리는 곳에 카르타고 노바(Carthage Nova)라는 도시를 남쪽 해안에 만들어 강력한 육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바르카 가문의 중심지로 삼았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후 8년에 걸친 정복 끝에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기원전 228년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후 하밀카르 바르카의 사위였던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Fair)이 그 뒤를 이어 7년간 통치했고 점점 더 히스파니아 내부에서 카르타고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경계한 로마에서는 에브로 강(Ebro River)을 경계로 더 이상 세력을 뻗지 않도록 조약을 맺었다. 하스드루발이 갈리아인 노예와 다투다 암살당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히스파니아의 식민지 관리인은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자 하스드루발의 처남이었던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이어받았다.

 

Hannibal Slodtz Louvre

 

 

전쟁 초기

 

Blank Map - Mediterranean

 

 기원전 219년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경영하던 한니발 바르카는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 동쪽 해안에 있는 사군툼(Saguntum)을 침공했다. 사군툼은 로마의 표면적으로는 동맹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속국이었고 로마는 한니발 바르카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에브로 강 이남 지역을 카르타고가 갖기로 했던 조약을 앞세워 한니발 바르카는 이를 거부했다. 겹겹이 포위를 시작으로 결국 한니발 바르카는 사군툼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상당한 전리품을 얻어 봉급과 부채를 모두 갚아냈다. 사군툼의 멸망을 들은 로마는 즉시 군대를 편성해 카르타고에 사절단을 보내 조약 위반에 대해 지적했으나 에브로 강 이 지역의 사군툼을 공격한 것은 합법이라는 카르타고의 주장에 로마는 선전포고를 한다.

 

Hannibal traverse le Rhône Henri Motte 1878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고 이듬해 기원전 218년 사군툼 전리품을 통해 전력을 보강한 한니발 바르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북상해 피레네 산맥(The Pyrenees Mountains)으로 향했다. 북상하는 과정에서 피레네 산맥의 원주민들을 맞닥트려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론 강(Rhone)에 도달했을 때 한니발 바르카의 도하를 저지하려는 갈리아인들과 만나게 됐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론 강의 상류로 군대 일부를 떼어내 도하시킨 후 갈리안인의 배후를 공격하게 했고 본대는 강을 건너 갈리아인들을 공격함으로써 갈리아인들을 퇴각시켰다. 론 강 전투(Battle of Rhone Crossing)에서 성공한 한니발 바르카는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한편 로마는 스페인에 원정에 필요한 동맹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사군툼이 멸망하는 것을 구경만 했음을 지적하면서 거부했고 갈리아 부족들에게도 한니발 바르카의 진군을 막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또한 거절당했다. 이에 로마에서는 현 마르세유(Marseille)인 마실리아(Marsiglia)로 군대를 파견했고 론 강을 건너기 전 한니발 바르카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도착했을 당시 한니발 바르카는 이미 론 강을 건넌 뒤였기 때문에 이마저도 실패했다.

 한니발 바르카는 론 강을 건넌 이후 마실리아에 도착한 로마군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 지역에서 전투를 치를 방안을 고민하던 중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들이 지원을 해주겠다는 요청이 오면서 알프스 산맥(Alps)을 넘기로 결정했다. 로마 또한 마실리아 지역으로 한니발 바르카가 남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군대 일부를 남겨 카르타고 노바를 침공하게 한 다음 나머지 군대를 북이탈리아로 보냈다.

 카르타고 노바를 향해 진군한 로마군은 에브로 강 북쪽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남겨둔 방위군과 조우했고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여세였던 카르타고군의 무리한 정면 전투를 통해 승리한 로마군은 에브로 강 북부에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해당 전투 이후 카르타고 세력은 두 번 다시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Blank Map - Mediterranean

 

 알프스 산맥을 올라가기 시작한 한니발 바르카는 북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당시 로마군과 싸우기도 전에 보병 절반 가량을 잃을 정도로 험난한 여정을 거쳤다. 하지만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도착했고 북이탈리아의 로마에게 적대적인 갈리아족과 동맹을 맺었다. 로마에게 호의적인 갈리아 부족들도 있었는데 한니발 바르카는 투리니 지방(Taurini)의 갈리아족이 동맹을 거부하자 투리니를 점령, 그곳의 갈리아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이탈리아에 도착해 병사를 모으고 있던 로마군은 학살의 보고를 받은 즉각 북상해 티키누스(Ticinus)에서 한니발 바르카군과 조우했다. 기원전 218년 11월 티키누스 전투(Battle of Ticinus)에서 카르타고의 기병에 밀려 로마군은 패배했고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피키오(Publius Cornelius Scipio)역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으로 보냈던 로마군은 카르타고 본국 침공을 무효화하고 즉시 북상하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군과 합류했다. 전력 보강은 한 로마군은 기원전 218년 12월 트레비아 강 전투(Battle of the Trebia)를 벌이게 되는데 한니발 바르카의 유인 전술에 말려들어 4만의 병사에서 2만이 넘는 병력을 잃으면서 대패했고,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에서 독립을 원하던 갈리아 족이 합류해 6만에 다다르는 병력을 보유하게 됐다.

 

Défaite de Scipion près du Téssin

 

 기원전 217년 봄이 되자 한니발 바르카군은 이탈리아 중부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아펜니노 산맥(Apennine Mountains)을 넘고 로마 수비군이 없고 홍수로 늪지대가 되는 아르노 강(Arno River) 상류의 길로 진군했다. 늪지대가 되는 곳이었기에 휴식을 취할 수 없었고 며칠 동안을 쉬지 않고 진군했다. 이 강행군의 결과로 카르타고군은 피로와 불면에 시달려야 했고, 인명 피해도 감수해야 했으며, 한니발 바르카 본인도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한니발 바르카의 이 강행군은 로마군이 예상한 장소에서 예상된 전투를 치르지 않기 위함이었고 이렇게 전투 없이 중부 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 바르카는 도시를 약탈하고 농지를 불태우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군대를 파견했으나 한니발의 진군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고 자신을 뒤쫓는 군대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니발 바르카는 매복하기 좋은 트라시메노 호수(Lake Trasimene)에서 매복 작전을 준비했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이러한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고 기원전 217년 4월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Battle of Lake Trasimene)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또한 전사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로마는 토스카나(Tuscany) 지방도 잃게 되었다.

 트라메시노 전투에서 승리한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를 지나쳐 로마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는데 이는 로마의 연합세력을 차례로 분리해 로마를 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는 로마를 공격해 항복을 받으려는 전략이었다. 이에 로마에서는 로마가 매우 위험할 때 선출하는 독재관(Dictator)을 선출했다. 독재관은 퀀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였는데 전통적으로 로마군의 방침이었던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바로 교전에 들어가는 식의 행동을 하지 않고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을 추격하며 견제하되 대규모의 전투는 벌이지 않고 소규모의 부대가 본군과는 분리된 적의 보급로 등을 공격하여 이득을 보는 전술을 구사했다. 처음에는 해당 전략이 먹혀들었으나 기원전 217년 9월 벌어진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Battle of Ager Falernus)에서 기껏 포위해놓은 카르타고군이 그 지역에서 약탈한 3천여 마리의 소의 뿔을 붙여 로마군 진영에 풀어놓아 한밤중에 기습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에 속아 카르타고군 전원이 그 지역을 빠져나가게 하면서 퀀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략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전면전을 계속해서 피해왔기 때문에 카르타고군이 점령한 도시들의 지역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광경을 전투 없이 구경만 해야 하는 무능해 보이는 방침에 대해 장교들과 병사들도 격분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퀀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로마 원로원에 소환되어 정치적 공세를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Marcus Minucius Rufus)와 함께 군권을 나눠가지라는 결정을 받아,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는 군대를 교대로 지휘할 것을 제안했으나 퀀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둘로 쪼개 각각 지휘하기로 했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는 퀀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략과는 정 반대로 카로타고군과 전면적을 위해 진군했고 몰리스(Molise)의 게로니움(Geronium)에서 게로니움 전투(Battle of Geronium)를 벌였지만 한니발 바르카의 전략에 당하면서 패주에 달아났고, 근처에 있던 퀀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구원 하에 간신히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간신히 패배를 면한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The Death of Paulus Aemilius at the Battle of Cannae

 

 한편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의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세력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지만, 기원전 216년 8월에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Apulia)에서 벌어진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에서 8만 6천 명의 로마군을 5만 명의 병력으로 맞서 기발한 기병, 보병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로마군을 포위, 그들을 섬멸해버린다. 훗날 한니발 바르카의 칸나이 전투에서 쓰인 전략은 망치와 보루 전략(Hammer and Anvil Tactic)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전쟁사에 영원히 남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Blank Map - Mediterranean

 

 칸나이 전투의 패배 이후 로마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이웃한 동맹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기원전 215년에는 캄파니아(Campania)의 대도시 카푸아(Capua)와 시라쿠라(Siracusa),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칼라브리아 지방(Calabria)의 거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 바르카 편으로 돌아섰다. 이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Macedonia)의 필리포스 5세(Philip V)도 한니발 바르카와 공동 투쟁을 선언했다.

 

 

전쟁 중기

 

Blank Map - Mediterranean

 

 한편 히스파니아를 담당하고 있던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는 전황이 악화된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는 점령한 사군툼에 잔류한 인질들이 로마군의 기습과 휘하 장교의 배반으로 인해 로마군에 넘어가면서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는데, 카르타고에서 지원해준 원군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자 카르타고 본국에서는 이탈리아로 넘어가 자신의 형인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Gnaeus Cornelius Scipio Calvus),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는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 바르카과 합류하면 로마는 멸망할 것으로 생각, 이에 스키피오 형제가 힘을 합쳐 데르토사 전투(Battle of Dertosa or Battle of Ibera)에서 격파,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 원로원에서는 로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갈리아인 남녀와 그리스인 남녀를 생매장하는 등의 여러 의식을 치렀고 공직 선거를 통해 로마의 분위기를 정비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이탈리아 북부에서 갈리아족과 싸우던 집정관 루시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Lucius Postumius Albinus)와 그의 군대가 실바 리타나 전투(Battle of Silva Litana)에서 전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칸나이 전투 참사에서 분주히 회복하려 노력하던 로마 시민들은 다시 한번 절망에 빠졌고 밤이 되면 무덤과 같은 고요함이 로마시를 뒤덮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로마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끊임없이 카르타고를 저지하고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로부터 로마가 지배권을 빼앗은 사르데냐(Sardinia)에서 반란 보고를 받았을 때는 즉시 로마군을 파견해 1차적으로 사르데냐 군을 저지하고 2차로 카르타고군이 상륙하자 기원전 215년 가을 치러진 데시모마누 전투(Battle of Decimomannu)를 통해 사르데냐 원주민군과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이후 사르데냐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다. 또한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카푸아에서 쿠마이(Cumae)를 독자적으로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사전에 알아차린 로마군은 매복한 카푸아군을 야습해 카푸아 최고 책임자를 전사시키면서 대승을 거뒀고 이 소식을 듣고 뒤늦게 한니발 바르카가 도착해 쿠마이를 공격했지만 이마저도 로마군은 미리 예측해 공성에 대비를 하고 있어 한니발 바르카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히스파니아에서도 로마의 스키피오 형제에 의해 카르타고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하면서 히스파니아 부족들 대부분이 로마와 손을 잡게 된다. 

 

 한편 기원전 214년에는 시칠리아섬에 있는 시라쿠사(Siracusa)와 로마와의 공방전도 발생했는데 육지와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가진 시라쿠사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공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가 발명한 온갖 공성 무기를 배치해 로마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후에는 카르타고 본국에서 보낸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해 아그리겐툼(Agrigentum)을 점령했고 이후 시칠리아섬에 있는 많은 도시가 카르타고와 연합하려고 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로마군은 시민들을 살육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등 섬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기원전 213년에는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로마 동맹 시 군단이 카르타고 동맹 시를 약탈하고 다니다 이를 저지하러 온 카르타고군과 회전을 벌였는데 카르타고군이 로마 동맹 시 군단을 섬멸하고 로마 동맹 시 군단의 수장을 생포하면서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카르타고군을 상대하려면 로마 집정관, 법무관급이 이끄는 로마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하지만 같은 해 로마군이 삼니움(Samnium)족을 정복하면서 로마의 군사적 부담이 크게 줄었고 카르타고군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었다.

 기원전 212년에는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군에 점령당한 타렌툼을 타렌툼 내부 인사와의 모략을 통해 전략적인 방법으로 손쉽게 재탈환했으며 카푸아의 여러 차례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타렌툼을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카푸아 근처에 한니발 바르카가 도착하자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고 루카니아(Lucania)와 쿠마이로 이동해 한니발 바르카를 카푸아로부터 떨어뜨리려 했다.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군의 생각대로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로마의 백인대장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Marcus Centenius Penula)라는 이름의 만기 제대한 인물이 한니발 바르카를 격파하겠다고 1만 6천의 병사를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를 향해 진군했다. 한니발 바르카는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가 이끄는 군대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자 자신이 직접 지휘해 전투를 벌이는데 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의 죽음은 물론 그가 이끈 1만 6천의 병사는 단 1천 명 만을 남기고 섬멸해버린다. 그와 동시에 아풀리아(Apulia)를 휩쓸고 다니는 로마군과 싸우기 위해 이동했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Gnaeus Fulvius Flaccus)가 이끌던 아풀리아의 로마군은 연이은 승리에 취해 한니발 바르카와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한니발 바르카는 경기병을 농지 주위에 숨겨놓았다가 로마군 배후를 치는 등의 전략을 통해 1만 8천 명의 로마군 중 2천만 남기고 살육해버렸다. 한니발 바르카의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카푸아 포위를 예정대로 진행했고 강력한 로마군에 의해 카푸아군은 성안에 갇히게 된다.

 한편 히스파니아에서는 스키피오 형제가 승리를 거듭하며 카르타고의 영토를 조금씩 점령해 나갔는데 사군툼(Saguntum)까지 전진한 로마군이 외교전에 집중하면서 잠시 전투가 멈추게 된다. 로마의 외교술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히스파니아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르타고 본국에서 증원해준 부대로 히스파니아 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입지를 호전시키는 게 성공한다. 반면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 내에서 연이은 승리와 강력한 존재감으로 인해 스키피오 형제는 로마 본국으로부터 군사 보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군은 입지가 호전되어가는 카르타고군을 제압하기 위해 서로 대치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211년 과달키비르강(Guadalquivir) 근처에서 벌어진 베티스 고지의 전투(Battle of the Upper Baetis)에서 참패하면서 로마 원정군은 궤멸되었다.

 로마군에 의해 포위된 카푸아는 점점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해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한니발 바르카는 카푸아로 향해 로마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카푸아군과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동시에 대비하기 위해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구축한 포위망을 통해 착실히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투가 벌어지자 카푸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로마군에 격퇴되었고 성문 내까지 로마군이 진입할 뻔했으나 성벽 위의 투창병으로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반면에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캠프 내부까지 들어와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로마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바람에 전열이 무너져 후퇴했다. 이 전투를 통해 한니발 바르카는 카푸아 포위망의 대비가 매우 잘되어 있고 카푸 아군이 빈약한 것을 확인하면서 포위망을 풀기 위한 방법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하기로 한다. 하지만 서로 대치만 했을 뿐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진영을 꾸리고 로마 성벽 주위를 관찰하던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가 카푸아의 포위망을 풀 생각이 없음을 알자 즉시 캠프를 거두고 로마를 떠나 카르타고군이 있는 브루티움으로 향했다.

 한니발 바르카가 떠나자 카푸아 시민들은 절망했고, 결국 로마군에게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로마 원로원은 점령한 카푸아의 시민을 노예로 삼고 카푸아의 자치권을 박탈하여 이들이 원로원도 공직자도 구성하지 못하게 했으며 로마에서 파견한 공직자가 카푸아의 통치를 일임하는 방침을 선포한다. 한편 한니발 바르카는 시칠리아와 캄파니아를 모두 잃게 되면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전쟁 후기

 

Blank Map - Mediterranean

 

 히스파니아 전선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로마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를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해 히스파니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했고 젊은 나이임에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세심한 전략과 전술로 카르타고군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 만에 식민지의 주요 거점이었던 카르타헤나(Cartagena)를 점령, 이로 인해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세력은 더 이상 본국이나 한니발 바르카에게 보급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로마군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세력을 거의 지워버렸고 기원전 208년 봄에 치러진 바이쿨라 전투(Battle of Baecula)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군대를 격파, 기원전 206년 봄 일리파 전투(Battle of Ilipa)를 통해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Numidia)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카르타고 세력을 괴멸시키고 로마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Blank Map - Mediterranean

 

 카르타헤나가 로마에게 넘어가는 동안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공성 장비도 없고 물량에서도 점점 밀리면서 이탈리아 내 우호적인 도시들을 하나하나 다시 로마에게 내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니발의 동생이었던 하스드루발이 바이쿨라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 이탈리아로 도착하면서 전황의 변화가 일었다. 로마 입장에서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원군이 엄청난 위협이었는데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전략적인 면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전술적인 측면에서 매우 적은 규모의 군대를 이끌던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승리조차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지속되는 전쟁에 인적, 물적 자원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니발 바르카는 전쟁 초기의 병력을 회복하게 된다면 로마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고 곧바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병력을 신속하게 요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니발 바르카는 동생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북이탈리아로 건너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천히 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게는 최후의 기회였다. 로마군은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군대를 모아 메타우루스(Metaurus)강 근방에서 기원전 207년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군대와 메타우루스 전투(Battle of the Metaurus)에서 승리하면서 한니발 바르카의 최후의 지원군을 전멸시켰다.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목은 한니발 바르카에게 보내졌고 이를 본 한니발 바르카는 크게 상심하여 이탈리아 반도 끝에 웅크려 나오지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다.

 한니발 바르카의 막내 동생이었던 마고 바르카(Mago Barca) 또한 일리파 전투 패배 이후 리구리아(Liguria)에 상륙해 게누아(Genua)를 기습, 점거하는 데 성공해 병력을 재편성한 후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려 했으나 이 역시 로마군에 의해 저지되면서 게누아에 고립되었다.

 전황이 로마에 유리해지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등을 위시로 많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의 본국을 직접 공격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의 왕이 된 시팍스(Syphax)에게 로마의 편이 될 것을 요구해 제안을 검토한 후 로마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카르타고가 절세미녀였던 소포니스바(Sophonisba)를 스팍스에게 보내어 그와 혼인시킨 후 회유하자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곧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3년 우티카 전투(Battle of Utica)와 바그라다스 전투(Battle of the Bagradas)에서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고 누미디아의 수도였던 키르타(Cirta)를 점령해 로마의 세력에 복속시키는 동시에 누미디아 기병대를 마음껏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Cornelis Cort - The Battle of Zama

 

 북아프키라와 이베리아에서 모든 세력을 잃은 카르타고는 멸망 직전에 몰렸지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한니발 바르카와 그의 동생 마고 마르카의 이탈리아 철수, 카르타고가 전쟁 배상금을 낼 것 등을 요구하면서 협상조건을 제시했고 이를 받아들인 카르타고는 한니발 바르카가 다시 북아프리카로 돌아오자 협상을 무시하고 다시 전쟁을 재개했다. 이로 인해 기원전 202년 최후의 전투인 자마 전투(Battle of Zama)가 벌어졌으나 로마군이 승리하면서 한니발 바르카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고 결국 카르타고는 항복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종결됐다.

 

 

전쟁 이후

 

Western Mediterranean territory, 150 BC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이베리아를 비롯해 갈리아와 그리스까지 뻗치는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카르타고는 항복 후 굴욕적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소국으로 전락했다. 한니발 바르카에게 당한 충격이 컸던 로마는 제2의 한니발 바르카가 나올 것을 두려워해 카르타고가 로마의 속국임에도 계속해서 핍박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제3차 포에니 전쟁 발발의 씨앗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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