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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April 23, 2019 / Spencer Davis

 

 

개요

 기원전 280년부터 275년까지 로마 공화국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과 그 동맹인 에페이로스 왕국과 벌인 전쟁이다.

교전국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
파일리그니(Paeligni)
마루키니(Marrucini)
프렌타니(Frentani)
다우니(Dauni)
움브리(Umbri)
마르시(Marsi)
카르타고 공화국(Ancient Carthage)



에페이로스 왕국(Epirus)
마케도니아 왕국(Macedonia)
아이톨리아(Aetolia)
아카르나니아(Acarnania)
아타마니아(Athamania)
테살리아(Thessaly)
타란토(Taranto)
삼니움(Samnites)
루카니아(Lucania)
브루티(Bruttii)
메사피아(Messapia)

 

Pyrrhic War Italy PioM

 

 

원인

 로마 공화국과 마그나 그라에시아(Magna Graecia)라고 불리던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그리스계 대도시인 타란토(Taranto)와의 작은 분쟁을 시작으로 피로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Artsakh in Europe

 

 로마 공화국은 세 번에 걸친 삼니움 전쟁(Samnite Wars)을 통해 이탈리아 중부의 패권을 장악했고 이로 인해 남부 이탈라아까지 로마가 세력을 뻗으면 타라스의 독립성을 잃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한 마그나 그라에시아에 속한 투리이(Thruii)의 귀족 정파들이 권력을 잡자 로마인과 손잡기로 하고 로마의 군영을 도시 내에 건설케 함으로써 타란토는 임박한 로마의 침략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기원전 282년 타란토인들이 디오니소스(Dionysus) 축제를 열어 바다에서 연극을 하고 있을 때 로마 선박이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 선박은 무장한 병사들과 식량을 가득 싣고 투리이에 설치된 군영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으나 타란토인들은 로마인들이 타란토의 영해에 침입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위반하고 침범한 것에 대해 즉각 해군을 출동시켜 로마 선박을 공격했다. 그 결과 로마 선박 수 척이 침몰했고 이로 인해 타란토인들은 로마가 이를 빌미로 공격해 올 것이라 판단, 로마와 전쟁을 벌일 경우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타란토인들은 에페이로스(Epirus) 의 피로스 1세(Pyrrhus)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병사와 선박을 투리이에 보내 친 로마 세력인 귀족 정파를 내쫓았다. 이후 투리이에 설치된 로마 군영에 주둔했던 로마군은 철수했고 로마인들은 생포된 포로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281년 로마 군단은 타란토로 진격했고 타란토는 삼니움(Samnites) 등 주변국으로부터 원군을 받았음에도 패배했다.  타란토 입장에서는 이탈리아 중부 패권을 쥐고 있는 로마와의 전쟁을 지속할 경우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 이후 휴전 조약을 체결하도록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에페이로스 왕국에서 보낸 원군이 도착하자 곧바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에페이로스가 타란토를 지원하게 된 이유는 과거 타라스의 도움을 받아 케르키라섬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국을 되찾는 것이었고,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섬(Sicily)의 지배자가 된다면 풍부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걸로 보인다.

 

 

헤라클레아 전투(Battle of Heraclea)

 에페이로스에서는 타란토에 지원군을 보내기 전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Thessaly)로부터 지원군을 모집해 기원전 280년 2만 5천에 달하는 병산들과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에서는 8만 병의 병력을 4개 군단으로 쪼개어 2개 군단은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Lucania)을 견제하여 에페이로스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로 했고 1개 군단은 에트루리아를 압박해 에페이로스와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마지막 1개 군단은 타란토로 가면서 루카니아인들의 영토를 약탈하고 에페이로스와 그리스의 식민지인 헤라클레아(Heraclea)로 진군해 칼라브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을 막고자 했다.

 

Artsakh in Europe

 

 시리스 강(Siris River)을 두고 대치한 로마군과 에페이로스 연합군은 로마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전투를 시작했으며 이는 역사상 최초로 로마 군단병과 그리스 팔랑크스(Phalanx)가 맞붙었고 서로 다른 강력한 두 중보병의 전투는 어느 한쪽이 무너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국 로마군에 대해 어떠한 우위도 갖지 못한 에페이로스 연합군의 피로스는 전투 코끼리를 투입하기로 결정, 측면을 공격하던 로마 기병들을 흩어지게 한 후 기병을 내보내 로마 군단병을 공격함으로써 전장을 장악했다. 로마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피로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투 이후 남부 이탈리아 그리스 원군이 피로스에게 합류했고 에트루리아에 진입하고자 진군하기 시작했는데 로마 공화국에서 전투 이전 견제하기 위해 배치해놓은 로마 군단에 의해 저지되었다. 결국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연합군은 후퇴했다.

 

 

아스쿨룸 전투(Battle of Asculum)

 기원전 280년 겨울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피로스 연합군은 로마군의 패배로 정복당한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로마에 정복당한 도시들과 로마의 결속력은 매우 튼튼했고 소수의 부족들만이 피로스 연합군에 가담했다.

 

Artsakh in Europe

 

 기원전 279년에 접어들자 북상한 피로스 연합군은 아스쿨룸(Asculum)에서 코끼리 투석기를 투석기를 가진 4만여 명의 로마군과 조우했다. 투석기뿐만 아니라 소가 끄는 전차도 동원되었는데 전차에 탑승한 병사들이 긴 창으로 코끼리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함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피로스 연합군은 숲과 언덕 지형에 방해를 받아 전투 코끼리와 기병대는 위력을 발휘하진 못했으나 팔랑크스가 활약하면서 로마군과 막상막하의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로마 동맹인 다우니(Dauni)군이 피로스 연합군의 주둔지를 공격했으나 전투 코끼리를 통해 다우니족을 격파했고 전투 코끼리에 대비한 로마군에 의해 어느 쪽도 확고한 승기를 잡지 못했다. 피로스는 전투 코끼리를 활용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 새벽이 되자 경보병을 보내 로마인들이 점거했던 험한 지형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 뒤에 이어진 전투는 평야에서 이루어졌고 전투 코끼리가 투입되자 로마군은 소가 이끄는 사륜 전차를 동원해 맞섰는데 전투 코끼리와 동행시킨 투창병이 전차대에 투창을 퍼부어 무력화시킴으로써 로마 군단병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투 코끼리를 동원해 로마군 사이를 흔들어 놓았고, 전열이 무너진 틈으로 기병을 내보내 로마군으로부터 승기를 잡아냈다. 전투 결과 로마군은 8천 명의 전사자를 냈고 피로스 연합군은 3천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하지만 많은 수가 장교들이었고 피로스는 자신을 축하하러 온 장교에게 '이런 승리를 한 번만 더 하면 우린 모두 끝장이다'라고 말했다. 훗날 이 문장은 언어학적으로 프로스의 승리라는 단어를 낳았는데 이는 너무도 많은 희생 끝에 얻은 승리라는 뜻으로 통한다.

 

 

베네벤툼 전투(Battle of Beneventum)

 아스쿨룸 전투 이후 피로스는 로마인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피로스는 에페이로스 동맹국가들의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요청이었으나 로마인들은 이를 거부했고, 피로스는 지속되는 전쟁 준비로 로마에 대항을 위한 카르타고(Carthage)와의 동맹을 추진했는데 카르타고에서는 로마군이 더 위협적이라 판단하고 피로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와 조약을 갱신, 피로스 연합군에 대응하는 효과적은 동맹을 맺게 된다.

 

Artsakh in Europe

 

 헤라클레아 전투와 아스쿨룸 전투를 연이여 승리했지만, 많은 전사자로 인해 전쟁을 지속할 의지가 꺽인 피로스는 시칠리아로 가서 그곳의 그리스인들을 카르타고로부터 지키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278년 카르타고인들은 피로스 연합군이 시라쿠사(Siracusa)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를 포위했고 피로스 연합군이 항해하기로 한 선박을 찾아 감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피로스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파노르무스(Panormos)와 에리스(Erice)를 점령했다. 여러 전투 속에서 계속되는 병력의 손실을 보충할 수 없었고 타란토에서 피로스가 떠난 뒤에는 로마군이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또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해상을 통해 피로스에게 주어지는  보급을 끊으려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피로스 연합군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로마인들과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에 피로스 연합군이 상륙하자 로마군은 2개 군단 2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남하시키기 시작했다. 로마군이 남하하는 도중 말레벤툼(Maleventum)에 야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피로스 연합군은 이들을 야습하기로 결정했으나 말레벤툼에 접근하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로마군은 이들의 야습을 알고 대비하기 시작했다. 피로스 연합군은 또다시 전투 코끼리를 투입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가려고 했으나, 로마군은 두 번의 전투를 통해 익숙해진 전투 코끼리를 절반 가까이 죽여가며 맹렬히 맞대응하면서 피로스 연합군은 뼈아픈 손실을 겪었다. 다음날이 되자 로마군이 피로스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해 결국 피로스 연합군은 철수하여 물러났다.

 전투 이후 로마인들은 안 좋은 상황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레벤툼을 좋은 상황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네벤툼(Beneventum)으로 변경했고 타란토로 후퇴한 피로스 연합군은 처음 이탈리아 땅에 도달했을 때 데리고 온 2만 5천의 병력에서 전투 이후 남은 병력 8천 명을 데리고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피로스 전쟁 이후

 피로스가 떠난 이후 로마군은 남하하여 타란토를 계속해서 압박했고 기원전 272년 타란토는 로마군에 항복했다. 로마는 타란토의 자치는 보장하나 로마가 필요할 때 군사적 원조를 해야 하는 조약을 맺게 했고, 타란토에 로마군의 군영을 도시 내에 설치해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타란토가 정복되자 이탈리아 남부 도시국가들 또한 모두 항복해 로마의 동맹시가 되었다.

 

Conquête romaine de l'Italie (400-264)

 

 피로스 전쟁을 통해 로마는 전투에서는 여러 번 패배했으나, 전쟁에서는 승리하면서 지중해에서 로마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였고, 로마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이 국제사회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으며, 이탈리아 내에서 로마에 대적할만한 나라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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