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기원전 343년부터 290년까지 진행된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삼니움(Samnites) 사이의 전쟁이다.
삼니움(Samnites)
이탈리아 중남의 아브루초(Abruzzo), 몰리세(Molise), 캄파니아(Campania) 내륙에 위치한 고대 이탈리아 민족이다. 이들은 오스칸어(Oscan-speaking)를 사용했으며 히르피니족(Hirpini), 카우디니족(Caudini), 카라세니족(Caraceni), 펜트리족(Pentri) 등 4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연합을 형성했다. 기원전 354년 갈리아(Gauls)에 맞서 함께 동맹을 맺었지만, 로마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기원전 290년 로마 공화국에 흡수되었다.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 - 341년)
험한 산악지대를 영토로 하던 삼니움족은 자원이 풍부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니아(Campania)를 탐냈는데 계속해서 삼니움족이 캄파니아를 공격하자 캄파니아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었고 이후 로마에게 삼니움족의 침략에 대비해 동맹을 맺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삼니움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로마는 삼니움족을 설득하는 방식을 택해 여러차례 제안을 했으나 삼니움족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은 로마 공화국에서 캄파니아에 지원군을 보내면서 제1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평원에서는 무적이라 불리는 로마 공화국은 평원지대인 캄파니아에서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고 산악지대로 물러난 삼니움족을 궤멸시키기 위해 삼니움족의 영토로 진입했다. 하지만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는 삼니움족에게 밀집 장창보병대(Phalanx)로 이루어진 로마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몇년간 대치한 끝에 기원전 341년 휴전을 맺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산악지대에서 고전하긴 했지만 제1차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 공화국은 승리했고 이로 인해 라티움(Latium) 지역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6년 - 304년)
제1차 삼니움 전쟁 이후 캄파니아 지역은 로마 공화국의 지배권에 들어갔고, 기원전 327년 오늘날 나폴리(Napoli)로 불리는 네아폴리스(Neapolis)의 그리스인이 로마의 캄파니아 통치에 대해 반발을 제기하며 난을 일으켰다. 로마의 원로원은 사절을 보내 그리스인의 반발을 잠재우려 했지만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고 삼니움에서 캄파니아의 반란을 부추기고 지원군을 보낸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마 공화국은 삼니움에 이런 사실에 대해 항의했지만 삼니움에서는 캄파니아와 삼니움의 지배하에 있던 오늘날의 사코(Sacco) 강이라 불리는 트레수스(Tresus) 강 근처 프레겔라(Fregellae)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 로마에서 먼저 동맹 규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제2차 삼니움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직후 기원전 326년 알리패(Allifae), 칼리패(Callifae), 루프미움(Rufrium)의 마을이 로마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삼니움 영토 내 각 지역에서 로마군의 승전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러 전투를 통해 삼니움의 패배가 보이는듯 했으나, 기원전 321년 풀리아(Apulia) 평원에 삼니움족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카푸아(Capua)에 있던 로마의 2만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풀리아 평원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는 거짓정보였고 삼니움족은 카푸아에서 풀리아 평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펜니노 산맥(Apennine Mountains)의 카우디움(Caudium) 협곡에 매복하고 있었다. 카우디움 협곡 전투(Battle of Caudine Forks)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협곡 내로 진입하자 나무를 쓰러드려 만든 바리케이트로 협곡 앞뒤를 막았고 게릴라전에 익숙한 삼니움족에 의해 화살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협곡 안에 갖힌 채로 군량마저 부족해지자 결국 항복하기에 이른다. 삼니움족은 항복한 로마군 600명을 볼모로 삼아 삼니움 침략을 포기하고 삼니움 땅에 로마인들의 식민 지배를 금지한다는 협약을 강요했다. 결국 카우디움의 평화라고 불리는 협약이 맺어졌고 로마와 삼니움은 5년 간의 평화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16년 실패를 교훈 삼아 전열을 가다듬은 로마 공화국은 가장 먼저 카우디움의 패배로 인해 로마 연합에 가입해 있던 삼니움족으로 돌아선 카푸아를 공격했다. 삼니움족 지원군을 모두 격퇴하고 카푸아의 유력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으며 이후 기원전 312년에는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건설했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군의 행군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고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삼니움족은 기원전 310년 캄파니아와 에트루리아(Etruria)들의 도시를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 공화국은 순식간에 반란을 진압, 여러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삼니움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결국 산지로 쫓겨난 삼니움족은 기원전 304년 로마 공화국의 무력을 앞세운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제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년 - 290년)
기원전 298년 로마 공화국이 이탈리아 내부에서 세력을 넓히느라 여념이 없을 때에 삼니움족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제2차 삼니움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전력 보충을 위해 루카니아(Lucania)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하지만 루카니아인들은 삼니움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었고 계속되는 거절에 삼니움족은 루카니아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루카니아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로마 공화국은 표면상으로는 부당한 자들에 대한 연민이었지만 실제로는 삼니움족이 루카니아를 제압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힘을 막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 직후 삼니움은 에트루리아(Etruria), 움브리아(Umbria), 갈리아족(Gallia)과 연합군을 구성해 로마 공화국에 대항했는데, 당시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Lucius Cornelius Scipio Barbatus)가 삼니움의 명장인 에그니투스(Egnatius)를 쫓다가 삼니움 연합군에 의해 로마 전군이 몰살당하는 등의 전투를 통해 전쟁 초기 삼니움이 승기를 잡았고 기원전 297년 삼니움 연합군이 이 기세를 몰아 세 방향에서 로마를 포위 공격하기에 이른다. 북쪽에서 포위해오던 에트루리아족이 전선을 이탈하긴 했지만, 왼쪽에서 갈리아군, 오른쪽에서 삼니움군이 포위하며 로마를 공격하는 전투는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삼니움족을 상대하는 로마군은 적의 전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총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갈리아군은 상대하는 로마군은 처음으로 총력을 다하는 전술을 투입했다. 전투 초기에는 갈리아군의 기병 등에 의해 로마군이 밀리는 양상을 보였으나 전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던 로마군쪽에서 기병을 투입하면서 급격하게 로마군 쪽으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날의 전투는 이탈리아 역사상 전례없는 대규모 혈전이었는데 연합군쪽에서 2만 8천 명이 전사했고 포로는 8천 명에 이르렀다. 로마군 또한 9천명이 이르는 전사자를 낸 전투였다. 이 날의 전투로 갈리아족은 북쪽으로 밀려났고 움브라인와 에트루리라인은 로마 연합에 가맹할 것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제3차 삼니움 전쟁까지 이어지면서 반 로마 동맹은 산산조각이 났고 이후 삼니움족은 홀로 기원전 290년까지 로마 공화국에 대항했으나 끝내 항복하고 로마 연합의 한 동맹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중남부의 제패를 완성시켰다.
'Series > S9: THE WA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로스 전쟁(Pyrrhic War) (1) | 2022.11.18 |
---|---|
제나라-연나라 전쟁(Qi-Yan War) (0) | 2022.11.17 |
라미아 전쟁(Lamian War) (0) | 2022.11.16 |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1) | 2022.11.14 |
페르시아 전쟁(Persian War) (0) | 2022.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