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기원전 491년부터 449년까지 페르시아(Persian)와 아테네(Athens) 및 스파르타(Sparta)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벌인 전쟁
전쟁 계기(기원전 499년 ~ 493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es) 제5대 왕인 키루스 2세(Cyrus II) 때 페르시아 영역에 속하게 되었던, 이오니아(Ionia)라고 불리는 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도시국가들이 일으킨 반란에 아테네가 개입한 것을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반란을 일으킨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반란에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규모에 지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에 있던 밀레투스(Miletus) 등이 자신들의 혈통과 연계가 있었고 민주정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쫓겨난 독재자 히피아스(Hippias)를 페르시아가 보호하는 등의 이유로 아테네가 전함 20척 정도를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참패했고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 또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진압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반란에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규모에 지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에 있던 밀레투스(Miletus) 등이 자신들의 혈통과 연계가 있었고 민주정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쫓겨난 독재자 히피아스(Hippias)를 페르시아가 보호하는 등의 이유로 아테네가 전함 20척 정도를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참패했고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 또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진압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히피아스의 망명 등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스타르타와의 마찰이 계속해서 생기자 페르시아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페르시아는 단순한 동맹이 아닌 전면 복종을 요구했고 아테네에서는 사절단을 보낸 것 자체를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테네는 이오니아를 도와준 것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갖질 않았고 페르시아는 복종을 맹세한 아테네가 배신을 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면서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7대 왕인 다리우스 1세(Darius I) 사위였던 아르도니오스(Mardonius)의 지휘 하에 아테네에 응징군을 보냈다. 아르도니오스는 아테네로 가는 도중 많은 광산이 있었던 타소스(Thasos) 섬을 처음 공격했고 페르시아 제국에 병합시켰다. 하지만 폭풍우로 약 30%의 함대를 상실하고 마케도니아 왕국(Macedonia)을 굴복시키는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아르도니오스가 부상을 당하면서 아테네까지 응징군이 도달하지 못했다.
1차 그리스 원정(기원전 490년)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에게 복종에 대한 대한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사신들을 처형해버리는 반응을 보이자 격노한 다리우스 대왕은 그리스를 공격하기로 결정, 이오니아 반란 때 지원했던 에레트리아(Eretria)와 아테네를 1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출정한 원정군은 지상군 25,000명과 600척의 함대로 순식간에 에테트리아를 제압했고 아테네 공략을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도시국가들에 지원군을 요청해 밀티아데스(Miltiades)와 킬리마커스(Callimachus)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마라톤 평원으로 파견했고 기원전 490년 09월 12일 마라톤 전투로 불리는 전투에서 아테네군 10,000명과 플라타이아(Plataea)군 1000명과 함께 페르시아군 6,400명의 사상자를 내며 페르시아와 전투에서 승리했다. 결국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페르시아는 철수했다.
2차 그리스 원정(기원전 480년)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 정벌 실패 이후 2차 원정군을 준비했으나 이집트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이를 진압하다가 병사했고 페르시아 아케네메스 왕조 제8대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에 의해 이집트, 바빌로니아 반란이 진압됨과 동시에 직접 그리스 2차 원정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향했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로스 동맹을 결성해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Thermopylae)와 아르테미시움(Artemisium)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테르모필레에는 스파르타의 아기아다이 왕조(Agiad dynasty) 17대 왕인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가 스파르타의 근위대 300명과 다른 도시국가의 지원군을 포함해 6천여 명을 이끌었고 아르테미시움에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갤리선 271척, 기타 함성 50여 척을 이끌었다. 이후 기원전 480년 8-9월, 3일 동안 페르시아군와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이라는 이름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가 영화 300의 배경이기도 하다.
20~50만 사이로 추정되는 대규모 병력의 페르시아는 3일 만에 테르모필레를 돌파하고 아르테미시움까지 도달하면서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시가지를 방화한 뒤 펠레폰네소스(Peloponnesian) 일대까지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살라미스(Salamis) 해협에서 그리스 병력과 기원전 480년 9월 살라미스 해전이라 명명된 전투를 벌였는데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에는 좁은 해협이었던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군은 전함 200척 정도의 피해와 함께 대패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한 페르시아군은 테실리아(Thessaly)로 돌아갔고 겨울이 다가오자 페르시아군 사령관이었던 마르도니오스(Mardonius)에게 상당수 병력을 남겨둔 채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했다.
3차 그리스 원정(기원전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겨울이 지나자 재차 그리스 원정을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아테레를 헬로스 동맹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는데 계속되는 시도에 실패하자 남하해 아테네를 다시 한번 불태웠다. 이에 살라미스로 피신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계속해서 지원 요청을 했고 이에 스파르타는 동맹국들의 힘을 합쳐 3만 명에 달하는 원정군을 파견했다. 여기에 아테네의 중장보병 8000명이 합류해 플라타이아로 진격해 페르시아군과 기원전 479년 08월 플라타이아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를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 해군은 이오니아 지역의 미칼레(Mycale) 전투에서 요새를 쌓고 버티는 페르시아 해군을 공격했다. 연합군의 동시 공격으로 페르시아군은 격파당했고 결국 그리스 본토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페르시아군을 몰아낸 여세를 탄 연합군은 세력 확장을 위해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Aegean Sea) 전체를 넘어 키프로스(Cyprus)와 이집트까지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스파르타는 소극적이었지만 아테네는 기원전 478년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해 페르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도했다. 기원전 475년 에게해 북부의 마지막 페르시아 점령지였던 에이온(Eion)에서 에이온 공성전을 통해 함락시켰고 이후 이오니아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기원전 459년에는 이집트의 반란을 지원했으나 페르시아에 진압당했고 키프로스에서도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으나 오랜 기간 전쟁에 피폐해진 양국은 결국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평화조약(Peace of Callias)을 통해 전쟁을 끝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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