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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 Athens Tours, Athina, Greece (Published on December 31, 2016 / Jaime Spaniol)

 

 

개요

 기원전 460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Athens) 주도의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과 스파르타(Sparta)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Map Peloponnesian War 431 BC

 

 

원인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 이후 아테네가 구성한 델로스 동맹은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평화조약을 맺기 전까지 에게해(Aegean Sea) 전체를 넘어 키프로스(Cyprus)와 이집트까지 세력 확대를 꾀할 정도로 아테네는 적극적인 공격을 통해 세력 확장을 했다. 이후 세력을 넓힌 아테네는 원정을 통해 확보된 해상 무역로뿐만 아니라 동맹 도시에서 반강제로 걷어들인 공납금을 기반으로 급성장을 이루었다.

 아테네의 국력이 급속도로 신장되자, 아테네를 제외하고 그리스 국가들 중 중심이 될 만한 크기와 힘을 지닌 국가였던 스파르타는 위기감을 가지게 된다. 거기에 더해 아테네의 민주정이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스파르타의 농노 계급인 다수의 헤일로타이(Helots)를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던 스파르타에게 큰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또한 해상 군에 강세를 보이던 아테네가 육군에 강세를 보이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성벽이 완성된 후에는 스파르타의 헤게모니(Hegemony)를 공식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주정이 그리스 전역에 퍼진 분위기 속에서 기원전 465년 스파르타의 농노 계급인 헤일로타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스파르타 인구의 약 7배 정도 되는 인구를 가진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동맹군을 소집하기에 이른다. 이때 다른 동맹군들은 다 받아들였지만 아테네의 중장보병 4,000명은 다시 돌려보내면서 아테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고 아테네 또한 스파르타에 대해 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과 적국에 모두 손을 내밀어 자신의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스파르타가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자들을 추방하자 아테네는 이들을 받아들여 코린토스 만(Gulf of Corinth) 북쪽 나프파크토스(Nafpaktos)에 정착시킴으로써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던 중, 기원전 460년 스파르타의 두 동맹국이었던 코린토스(Corinth)와 메가라(Megara)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 아테네가 메가라와 동맹을 맺고 코린토스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리스 전역으로 번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발점을 만들어냈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 - 446년)

 아테네가 동맹을 맺은 메가라는 코린토스 지협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육로로 오는 것을 봉쇄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동원해 메가라를 공격하는 코린토스를 막아냈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코린토스 만의 북부에 있던 포키스(Phocis)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도리스(Doris)를 침공하면서 이를 돕기 위해 스파르타에서는 바다를 건너 원정군을 파견했다. 스파르타에서 도리스로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돌아오는 길을 아테네 해군에 의해 차단당하자 아테네 내부에서 민주정의 전복을 원했던 일부 세력과의 연대, 그리고 보이오티아(Boeotia)를 통합하고자 했던 테베(Thebes)의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군은 보이오티아(Boeotia) 지역의 타나그라(Tanagra)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의 진격을 예상 못한 아테네는 급하게 군대를 모아 기원전 457년 타나그라 전투(Battle of Tanagra)라고 불리는 결전에 나섰는데 스파르타가 승리하긴 했지만 아테네, 스파르타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전투가 끝이 났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는 더 진격하지 못하고 육로를 통해 철수했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타나그라 전투가 끝난 후 2달 즈음 되었을때 테베가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보이오티아를 통합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보이오티아에 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했고 오이노 피타 전투(Battle of Oenophyta)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군대를 패배시켰다. 거기에 더해 테베를 제외한 보이오티아 대부분을 공격해 아테네 계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아테네의 해군력을 견제하기 위해 스파르타 동맹에 가입했던 아이기나(Aigina) 역시 델로스 동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아테네는 함대를 파견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자신들만의 강한 해군력을 통해 스파르타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기원전 460년부터 454년까지 진행된 아테네의 이집트 원정은 페르시아가 아테네의 원정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집트 반란군을 제압하면서 18개월에 걸쳐 아테네군이 포위되면서 끝내 분쇄되었는데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 전체에 큰 충격과 아테네의 공세 또한 둔화되기에 이른다. 이후 몇 년을 외부 원정보다는 동맹 이탈 방지를 위해 집중해야 했는데, 스파르타와의 휴전협상을 통해 기원전 446년까지의 휴전 조약이 조인되면서 아테네는 그리스 내부에서 분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후 아테네는 또다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휴전 조약이 조인되었음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직간접적인 분쟁은 계속되었고 그러던 와중에 기원전 447년 테베가 다시 일어나 아테네에 승리했고 보이오티아 전체를 수복하면서 아테네의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우보이아(Euboea)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아테네가 이를 막기 위해 북진한 사이 메가라에서 반 아테네 쿠데타가 일어났다. 또한 코린트 지협이 열리자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군은 아티키(Attica) 지역을 휩쓸었지만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스파르타로 돌아갔다. 이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이자 아테네 제국 초대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Pericles)가 스파르타 왕의 조언자를 뇌물로 매수해 진군을 저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스파르타의 위협이 없어진 아테네는 에우보이아로 다시 돌아가 반란을 진압했고 기원전 446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협정이 타결되면서 30년간의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평화조약 이후인 기원전 440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사모스섬(Samos)에서 델로스 동맹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아테네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개입하지 않았을 정도로 양국은 상대방의 세력권이나 동맹국을 건드리지 않고 평화를 유지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

  이오니아해(Ionian Sea)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코린토스의 식민지 에피담노스(Epidamnus)에서 민중파와 귀족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민중파는 귀족들을 추방했고 이후 케르키라(Kerkyra)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냈지만 거절당하자 때마침 케르키라와 갈등이 있던 코린토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코린토스는 민중파의 요구를 수용해 케르키라와 에피담노스 사이에 있던 아폴로니아(Apollonia)로 파병했다. 반대로 추방당한 귀족들은 케르키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코린토스가 군대를 파병하자 케르키라에서는 함선을 파병해 코린토스의 군대를 돌리고 에피남노스에는 추방했던 귀족들을 다시 수용하라는 요구를 한다. 이렇듯 양 도시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협상을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기원전 435년 충돌하게 된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에 2000명의 중무장 보병을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케르키라는 80척의 선단으로 맞서 승리하게 된다. 승리한 케르키라는 재해권을 장악, 코린토스의 식민지를 공격했고 1년간 대치하던 중 코린토스가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하자 동맹국이 없던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했다. 하지만 코린토스 역시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

 케르키라와 코린토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아테네에서는 케르키라가 직접 침공을 당할 때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맺기로 하고 1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하던 코린토스는 기원전 432년 케르키라 앞바다로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고 케르키라도 응수하면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코린토스의 승리로 이어지는 듯했으나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테네에서 함대를 파견하자 코린토스는 후퇴했다. 이후 코린토스가 아테네에게 개입한 이유를 물었고 아테네가 결정된 동맹을 설명하자 퇴각하여 승패가 정해지지 않고 해전은 끝이 났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이로 인해 코린토스는 아테네에 원한을 품게 되었고 아테네 역시 다시 한번 코린토스와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 본격적으로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라케다이모니아(Laconia)에서는 아테네가 포테이다이아를 공격할 경우 반격해 주겠다는 확답을 했다. 한편 사절을 보내 협상을 하려던 아테네와는 아무 성과가 없자 포테이다이아는 결국 아테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케도니아와 코린토스의 지원을 통해 아테네와는 싸움을 시작했으나, 아테네는 마케도니아를 함락해 휴전조약을 맺고 올린토스(Olynth) 지역에서 포테이다이아군을 이기고 포테이다이아시를 포위했다. 파죽지세로 아테네가 승전을 거두자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수장국인 라케다이모니에 동맹국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고 라케다이모니아의 왕이 동맹국 회담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개입, 아테네에게 후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는 다시 전쟁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기원전 432 - 421)

 전쟁의 시작은 테베의 플라타이아(Plataea) 기습 공격에서 시작되었다. 플라타이아는 동맹국인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구원군이 늦어지면서 플라타이아는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발생한 전투들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쪽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가져가지 못하는 채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지상군이 강세인 스파르타는 함부로 바다로 나가지 못했고 해군이 강세인 아테네는 지상전을 회피했기 때문이었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한편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성밖에 모든 농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대규모로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지역을 유린하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많은 인구가 좁은 시내로 몰리자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모두 안 좋아지면서 기원전 430년부터 아테네 역병이라 불리는 대역병이 수차례 돌았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30% 이상 상실하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기원전 429년에는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이후에는 아테네의 정권은 급진적인 주전파이면서 페리클레스의 정적이었던 클레온(Cleon)에게 넘어갔고 이로 인해 아테네는 전쟁에 대해 보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보다 적극적인 전쟁으로 바뀌긴 했지만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소모전으로 재정 상황도 좋지 않았던 아테네는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는 대신 경제적인 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이전처럼 대규모 함대를 운용할 자금과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작전 지역의 토착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기원전 425년에 아테네 함대가 시실리아(Sicily)로 보낼 지원군을 싣고 항해하다가 우연히 폭풍을 피해 스파르타 인근의 필로스(Pylos)라는 곳에 들리게 되었다. 필로스에 정박하게 된 지휘관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예전부터 필로스를 침공해 요새를 세울 것을 구상하고 있었고 때마침 필로스에 정박하게 되자 필로스 곶 입구에 방어 성벽을 쌓았다. 이렇게 완성된 요새는 스파르타에서 군대를 보내기에는 적당히 멀고 요새에서 출동한 아테네군이 스파르타의 후방을 괴롭히기에는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해역을 제압하기에도 아주 적절한 위치였다. 기회를 잡은 데메 스테네스는 병력을 이끌어 요새에 주둔시켰고 이를 알게 된 스파르타가 아테네 본토에 대한 원정을 중단하고 급히 돌아와 반격에 나섰지만 해당 요새는 이미 소수의 원군과 함께 방어태세를 단단히 굳이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까지 동원한 스파르타를 적절히 잘 막아냈고 다음날 대규모 아테네 해군이 도착하면서 스파르타 함대를 쫓아냈다. 이로 인해 필로스 곶을 후방으로 우회해서 공격하려던 440명의 스파르타군이 근처의 스팍테리아(Sphacteria) 섬에 갇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규 시민이 3500명에 불과한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갇힌 스파르타군 중 백여 명의 정규 시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나, 아테네의 강경 주전파 클레온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테네 역시 막강한 스파르타군을 육지에서 상대할 방법은 없었고 스팍테리아 섬으로의 식량 공급을 완전히 저지할 수도 없었기에 함대로 스팍테리아 섬을 포위한 채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아테네의 온건파에서 여론을 움직여 클레온이 직접 원군을 이끌고 가서 해결하도록 했는데 이미 공격 계획을 토대로 800명의 중보병과 1만 명 이상의 경보병을 섬에 상륙시켜, 스파르타군 다수를 죽였고 292명의 포로를 잡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필로스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아테네군은 계속해서 스파르타에게 등 뒤의 칼과 같은 존재였고 탈주한 헤일로타이를 받아들이고 보호함으로써 노예제로 부양되던 스파르타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로로 잡힌 백여 명의 스파르타의 완전 시민이 인질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아테네 근방에서 파괴행위를 할 수 없었고 임전무퇴로 알려진 스파르타군이 집단으로 항복한 사실 자체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스파르타와 한번 싸워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행운이 계속되진 않았다.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의 주요 동맹국인 테베를 굴복시키고자 했던 델리움 전투(Battle of Delium)에서 참패를 시작으로 기원전 422년 트라케 지방을 되찾고자 파견된 원정군은 상당한 지역을 회복했지만 암피폴리스 전투(Battle of Amphipolis)에서 패배함과 동시에 아테네의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Brasidas)가 전사해버렸고, 양측의 최대 강경파였던 두 명이 사망하자 그리스 전역에 평화의 분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42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50년간의 평화협정인 니키아스 화약(Peace of Nicias)이 체결되면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서로가 점령한 영토를 돌려주었다. 또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동맹이 되어서 스파르타에서 헤일로타이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아테네가 원군을 보내주기로 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기(기원전 421 - 414)

 니키아스 화약으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양측 감정의 골은 지워지지 않았다. 평화협정은 표면적인 것이었고 양측 모두 자신들이 얻어낸 성과를 포기하려 하지 않아 협정 내용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니키아스 화약 자체가 스파르타의 열세 속에서 맺어진 것으로 필로스에서 당한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스파르타 육군은 더 이상 무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아르고스(Argos)가 스파르타와 맺었던 30년 평화협적이 끝이 나면서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으며 아테네 강경파의 새로운 지도자였던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는 이를 기회삼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개입하고자 했다. 이렇듯 기원전 414년 공식적으로 협정이 깨질 때까지 7년간 두 세력을 서로를 약화시킬 기회만 찾는 냉전이 이어졌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30년 평화협정 동안 중립을 유지하던 아르고스는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주변의 만티네이아(Mantinea), 엘리스(Elis) 등과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을 결성하면서 스파르타가 있는 반도의 중부를 차지했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는 반도 북쪽의 다른 동맹국들과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이후 군대를 일으켜 스파르타 지척에 있는 테게아(Tegea)를 포위했고 아테네는 1,000명의 의용병을 지원해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와 아카이아 동맹 간 만티네이아 전투(Battle of Mantinea)가 발발했다. 전투 초기에는 스파르타의 무리한 기동으로 전열에 발생한 틈을 아카이아 동맹군이 파고들어 승기를 잡나 했지만 무적의 육군을 보유한 스파르타 답게 좌익에 배치되어 있던 엘리트 보병들이 가세하면서 도미노처럼 아카이아 동맹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아르고스 정예군과 만티네이아 연합군은 걷잡을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고 아테네군마저 전멸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결국 만티네이아 200명, 아테네와 아카이아 동맹군 200명의 손실을 기록하며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서 패권을 되찾았고 스파르타 육군의 무적 전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반면 아카이아 동맹과 아테네군이 스파르타 엘리트 보병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퍼져나가던 아테네의 민주정은 끝이 났다.

 

 이탈리아 남서부에 위치한 시실리아는 시라쿠사(Syracuse)라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라쿠사의 경우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졌고 나머지 작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펠로폰네소스 초기에는 전쟁과 관련이 없었지만 점차 전쟁에 휘말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원전 427년부터 시작된 아테네의 원정에 있었다. 시실리아 내부의 작은 도시국가들로부터 아테네는 시카쿠사를 견제하기 위한 요량으로 지원 요청을 끊임없이 받아왔고 시라쿠사 자체가 스파르타와 연계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Peloponnesian War

 

 기원전 416년 시실리아의 작은 도시국가인 세게스타(Segesta)로부터 아테네는 구원 요청을 받았다. 이웃 도시였던 셀리누스(Selinus)와의 전쟁에서 패한 직후 아테네를 끌어들여 다시 한번 전쟁을 재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는데, 이러한 요청에 아테네 내부에서는 민회를 통해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Nicias), 라마코스(Lamachus) 세명을 사령관으로 원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주전파의 지도자인 알키비아데스와 온건파의 지도자인 니키아스, 군 경험이 많은 노장 라마코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조화를 꾀하고자 했던 결정이었다. 하지만 출항 전날 밤 누군가가 행운의 상징인 헤르마(Herm)를 다수 파괴하는 일이 발생했고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가짜 증인을 내세워 알키비아데스파의 행위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원정이 시작된 후 시라쿠사(Siracusa)를 공격하여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포위하는 도중에 라마코스가 전사했고, 아테네 내부에서 군인들의 지지가 없어진 알키비아데스를 향해 페르마를 파괴한 것에 대해 신성모독 혐의로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알키비아데스는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해버렸다. 이로 인해 세게스타를 지원하기 위해 떠난 아테네의 원정군을 니키아스 홀로 전권을 쥐고 지휘하기에 이른다.

 아테네군에게 포위당한 시라쿠사는 사방으로 원군을 구하러 다녔고 때마침 스파르타로 망명해온 알키비아데스는 시라쿠사에 원군을 보내야 함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스파르타는 명목상으로 아테네와 휴전 중이었으나, 아테네의 시카루사 원정을 휴전 협정의 파기로 간주해 전쟁을 재개했다. 완전시민은 없었지만 스파르타는 곧바로 시라쿠사로 작은 규모의 지원을 보냈고 이 작은 규모의 병력은 스파르타의 예상과 다르게 시실리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아 아테네군의 포위망을 저지하기 시작, 결국 아테네의 포위 벽 건설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실패로 원정군이 위기에 빠졌음에도 니키아스는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과 아테네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해 철수하지 않았고 시라쿠사의 재정이 소진되어 아테네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만 기대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시라쿠사 해군은 아테네 해군을 격파, 출수를 봉쇄함과 동시에 유리한 지형은 선점함으로써 아테네 원정군을 시라쿠사에 완전히 고립시켰다. 고립된 약 4만 명의 아테네 원정군은 둘로 나뉘어 육로와 해로를 통해 탈출하고자 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던 시라쿠사군은 차례로 괴멸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의 아테네 직속 함선 160척을 포함 216척을 잃었고 4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으며 아테네 약 5년 치에 달하는 예산을 손실했다.

 아테네와 시실리아는 먼 거리였고 시라쿠사에서 탈출한 원정군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테네는 패전 사실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고 아테네 내부에 창궐한 역병과 더해 아테네 내부에 더없는 큰 피해를 초래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기(기원전 413 - 404)

 시실리아에서의 패전 이후 아테네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인적 자원 역시 큰 타격을 받았으며 한 때 지중해를 호령했던 해군은 100척 정도 수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의 도시 국가들에게 걷는 공납금을 올렸다가 강제로 오랜 시간 전쟁에 끌려다녔던 동맹국들의 불만에 불을 지피면서 여러 동맹국이 반란을 일으키고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테네의 시실리아 원정으로 인해 평화협정이 파기됐다고 판단한 스파르타는 공식적으로 아테네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테네 근처 데켈리아(Dhekelia)를 확보해 요새 화함으로써 아테네의 모든 육로를 차단해버렸다. 아테네는 모든 식량을 해상으로 수입해오면서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가져가야만 했고 스파르타가 아테네 근처 은광들을 황폐화시켜 노예 2만 명을 탈출시키면서 재정적으로 완전히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Greece relief location map

 

 이러한 상황에서 아테네는 해전에서 미숙한 스파르타가 해상에서 소극적으로 나오는 점을 이용해 델로스 동맹에서 몇 안 되는 자체 함대 보유국인 레스보스(Lesbos)와 사모스(Samos)의 반란을 저지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황 속에서 페르시아가 스파르타에게 함대에 대한 재정과 지상군 지원을 함과 동시에 아테네의 재산과 가족이 상당수 살고 있는 에우보이아(Euboea)와 중요한 식량 공급로인 헬레스폰토스(Hellespont)와 같은 반란 세력을 합세시켰고, 기원전 411년 아테네 내부에서 발생한 쿠데타로 인해 혼란에 혼란을 거듭, 아테네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위기에 빠진 아테네는 식량 공급로를 다시 되찾기 위해 모든 함대를 동원해 헬레스폰토스에서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와 전투를 벌였는데 기원전 411년 키노세마 해전(Battle of Cynossema), 기원전 410년 아비도스 해전(Battle of Abydos)에서 아테네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지상군이 해안가로 밀려온 스파르타 해군을 지원해 주면서 결정적 피해를 입지 못했다. 하지만 키지코스 해전(Battle of Cyzicus)에서 소수의 함대로 스파르타 해군을 꾀어내 포위 공격을 통해 전멸시키고 스파르타를 지원하러 온 페르시아 육군까지 몰아내면서 식량 수송로를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 더해 이오니아 일대를 남하하면서 대부분의 반란국을 제압하여 아테네 해상 제국의 판도를 거의 되살려내었다.

 키지코스 해전 이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평화협상을 원했지만 아테네에서는 이를 거부했고 노티움(Notium)에서 계속해서 스파르타 함대를 감시하면서 전투를 속행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지원과 아테네 선원들까지 포섭한 페르시아 함대는 기원전 406년 노티움 해전(Battle of Notium)을 통해 아테네와의 해상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탄력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은 아테네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에 아테네에서는 신전 지붕의 금까지 긁어모아 노예들까지 탑승시켜 100척 이상의 함대를 급조했다. 그렇게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Battle of Arginusae)이 발발했고 질적으로 열세였던 아테네 해군은 지휘권을 8명에게 나누어 각자의 전역에서 유기적으로 적을 상대하게 했다. 또한 스파르타 함선이 발휘하는 기동성을 저지하기 위해 2열 횡대로 함선을 배치하면서 돌진하는 스파르타 함선을 효과적으로 상대해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투 직후 태풍이 몰아치면서 아테네 해군은 철수해야만 했고 스파르타의 잔존 병력 또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전통에서는 전투 이후 생존자 구조와 시신 수습을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고 이를 방기 했다는 이유로 아테네 시민들은 재판을 열어 지휘관 8명 중 6명을 처형해버렸다. 이로 인해 아테네 스스로 유능한 지휘관들을 제거해버렸고 이후 아테네 지휘관들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스파르타의 함대가 아테네의 무역로를 끊고 에게해 연안의 아테네 동맹들을 파괴함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스파르타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안전하게 내달릴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아테네에서는 급하게 아이고스포타모이(Aegospotami)로 해군을 출정시켰고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Battle of Aegospotami)을 벌이게 되는데 스파르타 해군의 전략에 아테네 해군이 당하게 되면서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자신들이 멜로스(Melian)에서 했던 것처럼 스파르타에 의해 인종청소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6개월을 버텨냈고 장기전에 지쳐 있던 스파르타는 테베 견제를 위해 아테네를 존속시키기로 결정해 아테네에게 항복하고 패권을 넘기면 아테네의 국체와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기원전 404년 기나긴 전쟁이 끝이 났다. 이로 인해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에서 강대국으로 등극했으나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았던 스파르타였기에 페르시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다시 얻어내는데 일조했으며 스파르타의 특성상 아테네를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후에는 이러한 상황들을 극복하고자 했던 무리한 공물 징수로 반발을 사 제국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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